1. 류병엽, 뜨겁고도 건강한 조형 2. 류병엽 초대전에 부쳐 3. 소묘, 독립된 영역으로서의 그림 4. 柳鉼燁, 회화의 즐거움과 긴장감 5. 독백적 향수, 향수적 원시 6. 색면의 구성과 향토의 정서 7. COMPOSITI0N OF COLOR FIELDS AND N0STALGIC EMOTIONS2005년 런던의 테이트모던에서 개최된 <프리다 칼로(Frida Kahlo,1907~1954)전>은 유럽은 물론 세계의 관람객들로부터 다시 한번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그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DiegoRivera, 1886~1957)의 작품을 더하여 특별히 개최된 이 전시는 한여인의 드라마틱한 일대기를 생생하게 만나게 되는 감동도 있지만 멕시코의 생활과 사회상이 그녀의 섬세한 관찰력과 표현형식에 절절히녹아있어 더욱 뜻 깊었다. 범(汎)세계적인 담론, 유행사조를 논하지않더라도, 한 작가의 소중한 기록과 시각만으로도 얼마든지 가치를발휘할수 있음을 제시한 대표적인 예이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화가의 시각자체는 이미 하나의 회화다"라고 말했듯이 결국 한 작가의 캔버스는그 자신의 삶과 환경의 투영일 뿐 아니라 그가 살아온 생활의 현장으로부터 비롯되는 소재의 특수성을 지닌다. 우리나라의 현대미술을 말하면서 단골로 논의된 것이 바로 '정체성'에 대한담론이었다 그럼에도 그중에서 간과한 부분의 하나가 바로 작가의 개인적인 정체성과그들이 남긴 극히 자연스러운 한국적 가치들에 대한 관점을 논하는담론들이다.
독백적 향수, 향수적 원시
이번 갤러리 현대가 기획한 <류병엽전>은 한국의 '향토적 소재' 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면서 대작 시리즈로 이어지는 그의 독자성이충만해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시각을 자극하는 강한 색채와 함께 지극히 향토적인 주제들로 가득한 대작들을 만나면서 그 현대성을 제시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매력은 역시 한국의 '향토성(鄕 吐 性)' 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우선 소재면에서 살펴보면 인왕산과 정선 등이 섞여 있지만 대부분 그의 고향 전북 순창의 아미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금과면 남계리의 향리풍경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 작가가 40여 년 넘게 생활해 온 서울의 일부와 다른 지역의 풍경이 있다 작품의 내용은 대부분 그가 성장하면서겪었을 법한 할머니, 마을, 소, 두루미 등에 대한 기억, 푸른 하늘과 구름, 나무들과 숱, 마을의 우물, 밭갈이 같은 어디서나 만나게 되는 시골의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소재들은 이미 40여 년간 다뤄져왔고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어디서나 대할 수 있었던 자연 그대로의 대상들이라는 점에서 그의 대담한 화면이 갖는 의미가 있다. 이번 전시에서 인을 수 있는 몇 가지 특징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재, '강렬한원시적 색채'다. 이는그자신도말하고 있지만 '쌍스러울 정로 로 강렬한 에너지를 응축한다. 파란색의 정점이라고 불리는 울트라마린 블루(ultramarine blue)을 주축으로 적색과 노란색, 녹색, 브라운, 블랙 계열의 원색들을 거침없이 배열하고 있다. 특히 <인왕산 추경>은 그 중에서도 색상 간의 현란한 배치를 이루면서그가 살아온 인왕산 자락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전통적인 오방색의 개념과 상통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자신의 심성적 에너지로부터비롯된 프리미티즘인지 명확히 구분하긴 어렵지만 그 자신의 시각으로 성형화돼 온 부분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일상적으로 비유되는 것이지만 우리 민족의 강렬한 색채의식은 단청이나 일부의 공예품, 불화나 민화, 무신도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이른바 오방색류의전통적인 색채개념이다.
그의 전통색에 대한 흔적은 민화적 체취를 풍기는 1995년작 <조선의 호랑이>에서도 읽힌다. 이 작품엔 유년시절 농촌생활에서 얻은 자연스러운 시각경험이 배어 있다 그러나 작가의 작업노트에서는 의식적으로 전통색을 추구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그가 몇 차례에 걸쳐 기록한 것은 마티스적 강렬한 색채의식이다. 대학시절부터써 온 그의 작업노트를 보면 마티스적 강렬한 원색에 우리나라 전통색채의 자연스러운 접목을 시도한 것으로 유추된다. 근현대 한국 미술사에서 박생광, 유영국에게서 색채의식이 있었지만그 유형은 많은부분에서 다르게 나타났다.
둘재, '음영의 배제와 입체적인 마티에르' 이다. 면 분할 형태가 마치 색종이를 오려붙인 듯 처리되고 음영이 없이 단조로운 색상만으로이루어지는 특징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은 입체적인 마티에르를 구사하여 두껍게 올려지는 물감의 입체적인 단순함과 단편적인원색의 배치에서 오는 강렬함으로 회화적 감성력을 확보한다. 여기에색면과 색면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반면에 고(高)채도이면서도 원색조의 색과 색 사이의 배치가 현격하게 대비되면서 전체화면은 더욱 강렬한 에너지를 내포한다. 류병엽의 이러한색면 처리는 음영이 없는 단순한 색상혼합만으로 비교적 순수한 색성을 강화하면서 생명력과 원시성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의 이러한 색채는 이미 1990년대부터 산과 들녘,마을과나무등에 전면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전면적인 원색조와 함께 그의작품에서 백색의 의미는 매우 독특하다. 마치 여백을 남기는듯 구름과 동물, 사람 등에 백색을 적용하면서 흑색의 윤곽선만으로 형태를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굳이 백색을 전통적인 색채로 연결지을 까닭은 없겠지만 그의 강렬한 색채의 자연세계는 상대적으로 백색으로 표현된 두루미나 농부,소 등의 요소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즉 백색을 통한 이상향(理想鄕)의 상징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그의 이러한 색채관은 밭갈이 하는 농부나 소, 유람객, 천진무구한 인물의 생략된 표정들, 젖을 먹이는 어머니 등 대상을 막론하고 예찬적이다 순진무구의 원초적 풍경들인 셈이다.
셋째, 화면의 분할과 기호화된 언어들이다. 즉 전면적으로 나타나는 작은 점과 원, 장식적인 문양처럼 등장하는 나무, 다양한 직선의분할 등으로 기호화된 작업의 면면은 주로 나무의 열매 등으로 상징되는 풍성함과 음영이 없는 단순한 색면들의 색다른 처리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가 말하려는 '추억의 파라다이스' 이다.
넷째, 형태의 원형을 추구하는 간결함과 색채의 원초적 회귀가 맞물리는 색과 형의 간결성을 들 수 있다. 1995년작 <귀가>에 중앙의 붉은 소와 밭일 하는 흰색 농부들, 어디론가 떠나고 있는 부부가 그려졌는데 특히 붉은 소의 형상은 그가 추구하는 단순성과 원시성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좋은 예다.
"좋은 그림에서는 나무비린내가 난다. 이제 막 맛이 들기 시작하는청과(靑果)처럼 해의 비린내가 난다. 그림에서는 원초적(原初的)인비린내가 바로 그림이 지닌 생명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문명(文明)이 활개치는 이 사회에서 어떤 정신과의 만남을 시도하고 나타내고자한다. 나는 회화는 원초적인 정신으로 회귀하여는 현대적인 요망에서비롯된다."
-<나무와 해와 바람과 원시적인 비린내와> <<공간>>(1982.8)중에서
이 글에서 그가 어떠한 시각으로 원시성을 추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색상과 형태 두 가지 코드에서 모두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이는 1990년대의 인물과 인체데생을 참고하면 쉽게 간파되는부분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노작들에서 추구된 프리미티즘을 '한국적인원시성' 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시간을 두고 고려할 문제이지만 원초적 단순함과 순수, 소박이 갖는 치졸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원초적 이상향'을 구현한 키워드로 여겨진다. 또한 이 점은 과거 여타의관념화된 향수나 자연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적 변용의 가능성을제시하면서 그 독자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있다.
"우리는 가끔 예외적인 적에서 간한 개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 경우,예외적이란 보편적인 시대의 미의식의 수준에서 저만큼 벗어나있는,전연 독자적인 미의식을 말한다.미술사를 통해 이러한 예를 가끔 만나게 된다. 류병엽의 경우도 이런 예외적인 범주에 넣을 수 있지않을까 생각된다.그의 그림은 적어도 어느 특정한 유파나 이념에 결속되지 않은,그야말로 자유 의지에 의한 가장 순수한 정감의 표출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오광수<뜨겁고도 건강한 조형>신세계미술관 전시(1982)서문 중에서
오광수의 이 글에도 언급돼 있지만류병엽은 이른바미국과유럽의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비교적 부분적인 관계만을 유지하고 있다그는 줄곧 독자적이고, 자생적인 무엇을 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모던과 포스트모던 등 동시대의 사조와는 다르며, 친숙한내면의 새로운 시각언어를 제시하면서도 생경한 역설과 이중적 판계에 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우리의 자생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생경하다. 바로 그 역설을 거슬러서 이루어져야 할 류병엽과 글로벌시대담론들의 해토(解土)는 다시금 지속되어야 할 화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