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류병엽, 뜨겁고도 건강한 조형 2. 류병엽 초대전에 부쳐 3. 소묘, 독립된 영역으로서의 그림 4. 柳鉼燁, 회화의 즐거움과 긴장감 5. 독백적 향수, 향수적 원시 6. 색면의 구성과 향토의 정서 7. COMPOSITI0N OF COLOR FIELDS AND N0STALGIC EMOTIONS이런 현상은 시대적인 미술의 기류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60년대나 70년대의 미술이란 것이 크게 본다면 집단적인 미술로 특징될 수 있다. 집단적인 미술운동이 한 시대를 주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작업이 시대적인 미의식에 강하게 견인된 현상은 자연 시대적 추세에 동떨어져 있는 작가들의 작업을 소외시킬수 있다.
80년대로 오면서 서서히 집단적인 활동의 시대가 그 막을 내리는 대신 개인의 신화가 강한 관심으로서 추이되어지고 있다. 오랜 집단적 미술의 추세 속에 매몰되었던 개인의 활동이 빛을 보는가 하면, 오랫동안 지하에 묻혀왔던 개성적인 작가들의 발굴작업이 활발하게 전개되어지고 있다. 柳鉼燁의 작품이 최근 2,3년래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도 이런 시대현상에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본다.
어쨌거나 개인적 신화가 그 막을 연 시대에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개인적 신화가 갖는 밀도가 상대적으로 돋보일 수 있었다는 증좌이기도 하다.
그러고보면, 그의 작품은 어떤 유파나 이념적 결속에 의한 집단활동에는 도무지 걸맞지 않은, 낯선 느낌을 준다. 물론 그가 오랫동안 象形會란 그룹에 소속되어 활동해오긴 했어도 적어도 작품을 통한 소속감이란 것은 전연 찾아볼 수가 없다. 한 말로 그의 작품은 어디에고 끼일 수 없는 강한 체취를 발산하고 있다.
이와같은 체취는 다름아닌, 화면을 지지하고 있는 중심축이 프리미티비즘과 엑스프레숀이기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원생적인 생명감과 표현적인 밀도가 융화되어있는 화면, 때때로 이 두 개의 요소는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일체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때문에 생명적인 충동이 강하면 강할수록 기교를 앞지르는 표현적 감동이 화면을 덮어버린다. 때때로 화면에 보이는 치졸성은 뎃생이나 구성력의 미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감동자체의 순수성을 그대로 유지시킬려는 독특한 표현의 진행에서 연유되는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몇 차례 발표된 뎃생전에서 보여준 견고한 뎃생력과 구조적인 심도는 그의 출발이 결코 치졸한 바탕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웅변해주고 있다.
그의 작품을 관류하는 주요한 관심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소재주의다. 소재에 대한 관심은 어느 특정한 대생에 대한 애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애착이 구체적인 작품으로서의 동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주로 다루고 있는 소재들은 극히 범속한 일상의 경험에 뿌리를 둔 것들이다. 작가의 생활주변이나 일기와 같은 나날의 삶의 기록 같은 것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때때로 나타나는 먼 과거의 정경들도 이런 생활단면과 밀착되어있는 개인적 역사의 기록으로 치부되어지는 것들이다. 특히 최근에 오면서 빈번히 등장하는 이 과거적 소재들은 그의 조형적 중심축의 하나인 프리미티비즘과 깊은 관계에 놓여 있다. 말하자면 가장 순후한 원생적 삶의 모범이 다름아닌 개인적 역사의 기록속에서 찾아진 것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림을 대하고 있으면 훅 끼처오는 강열한 흙냄새는 그의 프리미키비즘의 뿌리가 자신의 생을 일구어준 고향에 가 닿아있다는 것을 이야기 해준다. 뿌리뽑힌 도시인들의 각박한 삶의 현장에서 이들 작품이 환기하는 정감은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강열한 추억과 회귀의식이랄 수 있을 것이다. 억샌 잡초와도 같은 우리네 원형적 삶의 적나라한 심성의 표출이 가져다주는 저 풋풋한 건강한 체온. 그것은 확실히 우리시대의 소중한 자신의 발견일 수 있다.
추수기에 도리께질을 하는 흰 무명 바지저고리의 농부가 보여주는 소박한 힘의 무게나, 소담그럽게 담긴 과일 바구니를 들고 서있는 시골 아낙네의 건강한 얼굴 표정.
그것은 우리들 아버지나 어머니의 꾸밈없는 초상이다. 이랑을 메는 농부나 지팡이에 의지해서 먼 들녁을 바라보고 있는 흰옷의 촌노, 거울 앞에 앉은 새색씨의 모습등은 우리들 기억 속에 투영되어진 형이나 할아버지나 누나의 모습들이다. 그 모습 속에 잠겨있는 삶의 원형으로서의 그리움같은 것이다. 이런 작품을 보고 있으면, 어느덧 살아있는 즐거움같은 것이 뿌듯이 솟아 오르는데, 아마도 그것은 단순한 소재가 주는 원시성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색채와 구성의 자율적인 관계의 긴장에서오는 회화적 즐거움이 동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골 새악씨 방의 고물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애조뛴 유행가 가락, 머슴방에서 벌어지는 노름판의 땀내나는 열기와 번득이는 눈망울, 신명잡힌 무당의 몸짓, 휘파람을 훽훽 불어대는 촌머슴애의 촐랑이는 연륜이, 때로는 청청하게 때로는 목쉰 가락으로 저미어저 구성의 탄탄한 그물망 속에 걸러나온다. 그래서 이들 그림 속엔 퀴퀴한 토담벽의 내음이 있고 핏발선 눈망울이 있고 촐랑이는 어깨짓이 있다. 그런 내음과 몸짓이 구성의 인자가 되고 색채의 질료가 된다. 이처럼 그의 그림은 단순한 과거의 추억을 소재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어느 원형적 삶이라고 할 수 있는 생생한 체험의 조형화를 시도하고 있다.
언젠가 나는 그의 작품을 두고 독일표현주의 화가 킬히너와 비유한 적이 있다. 70년대 후반경의 일부 작품들에선 킬히너의 거칠은 붓질의 강인성을 연상케하는 요소들이 검출되었었다. 최근의 작품에선 이런 거칠은 텃치가 만드는 구성적 의지보다는 색채의 대비와 분활적인 면의 구성에서 밀도있는 조형화를 시도할려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붓질은 그만큼 숨을 죽이고 대신 색면의 대비적 밀도에서 뜨거운 표현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어떻게 보면,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한결 정돈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적절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화면의 바닥 깊숙히 울어나오는 것은 야수적, 원생적 체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색면의 조화를 기도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돌한 대비를 통해 나타나는 충격적인 상충이 불러 일으키는 긴장의 지속에서 파악되어진다. 흰 모노톤의 바탕에 극히 암시적인 몇 개의 선으로 요약하고 그 위에 대상을 앉힌 고산식물이나 누드는 극도로 단순한 구도를 취하고 있으면서 소재의 바닥에서 울어나오는 끈끈한 힘을 느끼게 해준다. 흰 벽과 검은 지붕의 집이 있는 풍경이나 해바라기를 든 여인, 그리고 꽃과, 과일이 메달린 나무와, 나무를 타고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더욱 단순화해가는 소재의 요약을 엿보여주면서 이 단순화의 밀도가 강인한 내면의 힘에 의해 지지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같은 조형상의 특성은 소재에의 관심에 못지않게 장식적 밀도로서의 구성주의에로 이끌어가는 요소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큰 길에서 보는 산마을의 풍경이랄지, 마을 뒷산 솔밭 풍경이랄지 하는 비교적 많은 설명이 들어와 있는 화면에서도 모든 대상이 색면의 관계속에 함몰되어가는 구성의지를 읽을 수 있으며, 구름처름 피어오르는 녹색의 숲이나, 바다와 섬과 배를 다룬 남쪽 바다의 풍경등에선 그러한 의지가 더욱 강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극히 단순한 구도의 수박과 복잡한 풍경적 요소를 담고 있는 연못과 비교해 보아도 여기엔 한정된 몇 개의 원색에 의한 구성에 지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상에 깊게 뿌리를 내린 소재에의 애착과, 화면이라는 회화 자율의 의지가 서로 부딪치면서 미묘한 극적 변화를 유도해내고 있는 것이 그의 근래의 작품들에서 만나는 긴장감이다.
이 긴장감은 우리들 생활과 예술을 연결해주는 또 하나의 끈이 될 것이다. 그의 작품이 우리들에게 소중한 의미로서 계속 남을 수 있는 요인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